서문
돌봄이라는 주제
돌봄을 논한다는 것은 가정사 논의가 아니라 사회경제체제 발전과 나아가 글로벌 발전과 관련해서 돌봄을 논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돌봄 상황을 개선하려면 돌봄을 정치의 핵심적 의제로 만들 필요가 있다. 돌봄이 글로벌 거버넌스의 대상이 될 만큼 관심이 고조된 배경에는 1990년대 이후 특히 아시아에서 두드러진 노동력의 대규모 국제이동이 있다. 이주노동자의 대다수가 직간접적 돌봄종사자이기 때문이다. 국제기관들이 장차 돌봄문제는 곧 이주노동자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과 여성의 상황은 돌봄 논의에서 큰 주제다. 그 이유는 여성과 가정에 관한 오래된 관념을 바꾸는 것이 돌봄문제 해결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바꾸어야 할 관념이란 ‘돌봄은 사회적으로 덜 중요한 일이며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직면한 재생산위기는 이러한 해묵은 관념과 풍토의 결과다. 재생산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정책에도 그 바탕에 가족주의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면 ‘좋은 가족’은 40~50년 전에는 소산가족이라고 규정되었지만 오늘날은 다자가족을 좋은 가족이라고 선전한다. 그런데 그 정책의 바탕에 있는 가족주의 이념은 변하지 않았다. 정책이념의 변화 없이 정책목표가 정반대가 되어 있는 기묘한 현상이다.
좋은 돌봄은 무엇보다 성숙한 인간관을 기본으로 한다. 성숙한 인간관이란, 인간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도 불가능한 ‘약한 존재’이며 상호의존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제8장은 인간다운 케어를 지향하는 국제사례로서 ‘유머니튜드’나 ‘벨리데이션’ 실천을 소개하는데, 그것들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 기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소중히 대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이 책은 케어 본질 논의에서 먼저 이 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돌봄 논의는 인간관의 논의에서 시작되며, 그 논의는 가정과 국가와 글로벌 거버넌스에 걸쳐 있다. 이 모두가 이 책의 논의 대상이다. 돌봄문제에는 고유의 역사문화적 전통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의 배경에 있는 역사적 맥락 또한 돌봄 논의의 주된 내용으로 삼는다.
케어의 개념에 대응하는 책의 구성
약 10여 년 전부터, 서구의 저명한 ‘care’ 관련 저서들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어 왔다. 원저자가 사용한 ‘care’라는 용어는 거의 모두 ‘돌봄’으로 번역되어 있다. 국내에서 돌봄이라는 용어의 범위는 논객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좁은 의미의 돌봄은 육아, 그리고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이나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체적 돌봄을 뜻한다. 교사나 간호사 등 전문직의 원조행위를 돌봄에 포함시키는 논객들도 드물게 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의료(Health Care)는 돌봄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그러나 ILO 등 국제기구가 규정한 ‘care’는 의료행위 등 전문직의 원조행위까지 포함시키고 있고, 요양보호사도 의사도 ‘케어노동자’(care worker)의 범주 안에서 논의한다. ‘케어경제’(Care Economy)라는 용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돌봄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으로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care’는 ‘케어’라고 표기하여 사용한다.
케어는 인간을 보살피는 행위의 총체다. 제2장에서 자세히 검토하지만 그 범위는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목표로 신체 돌봄을 조건으로 하는 다양한 원조행위다. 한국에서 주로 ‘돌봄’이라고 지칭되는 개념이며 이 책에서도 이것을 돌봄이라고 칭한다. 이에 관련된 내용은 돌봄 및 돌봄인(care giver)의 현실과 문제상황을 가져온 역사문화적 배경이며 제3장과 제4장에서 주로 논의한다.
둘째는 인간의 발달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전문직의 원조행위다. 사회복지사, 교사, 간호사, 카운슬러, 심리치료사, 의사 등의 전문직 실천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영역의 과제는 케어전문직의 과제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주로 제5장과 제6장에서 교육 및 의료 전문직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전문직의 윤리는 ‘사회와 전문직 사이의 사회계약’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전문직의 역사적 발전과정의 고찰을 통해 밝힌다. 그리고 영케어러(young carer)의 발견과정에서 나타난 전문직의 과제를 제시하고, 장차 그 역할이 기대되는 요양보호사가 전문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셋째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포용하는 태도로서의 케어다. 배려, 공감, 포용을 실천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활동, 그리고 보다 케어 친화적 정책을 지지하는 태도가 여기에 포함된다. 나는 이타주의를 바탕으로 설계된 제도와 정책은 보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양성하며, 반대로 사회서비스의 과도한 시장화는 우리사회의 이타주의적 가치를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제7장과 제8장은 이에 관련된 내용과 더불어 케어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연구 및 실천의 사례를 소개한다.
요컨대 이 책은 케어의 본질 논의와 더불어, 돌봄 및 돌봄인 문제, 케어 전문직의 본질과 그 윤리문제, 이타주의적 시민의 양성에 필요한 조건의 논의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케어의 범주가 세 가지라고 하더라도 그 각각의 본질은 모두 같다. 그래서 케어의 본질에 관해서는 책의 첫 부분(제1장 및 제2장)에서 논의한다.
(하략)
차례
서문
제1장 ‘서로 돌보기’라는 삶의 양식
1. 의식해야 할 차별문제
2. 인간차별의 사상과 그 기원
3. 반(反)공생의 역사와 그 교훈
4. 돌봄사회의 전제: 행동하기와 변하기
5. 돌봄사회의 인간관과 사회관
제2장 돌봄과 케어: 사회 존속의 조건
1. 돌봄 및 케어의 용례와 구분
2. 케어의 개념 정의
3. 케어는 왜 권리인가?
4. 인간발달을 보장하는 케어: 몇 개의 사례
5. 돌봄 없이 사회 없다: 할머니가설의 시사
제3장 저평가된 돌봄노동, 그리고 반성의 목소리
1. 돌봄노동의 가치를 경시하게 한 세 가지 이분법적 사고
2. 공감의 재발견: 케어의 기초 그리고 사회질서의 근본
3. 여성 케어규범의 제도화
4. 길리건이 제기한 또 하나의 목소리
5. 여러 케어 논객들
6. 케어노동의 특성
제4장 케어경제론과 케어의 제도화
1. 케어를 사회경제 속에서 파악하기
2. 케어의 제도화와 그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3. 케어는 어떻게 제도화되는가?: 영케어러를 소재로
4. 영케어러 지원제도는 왜 영국과 다른 제도가 되었나?
5. 가족과 국가: 적절한 케어분담
제5장 케어전문직의 본질과 역할
1. 전문직의 본질
2. 의사와 변호사는 어떻게 전문직으로 발전했나?
3. 케어전문직의 동기: 희생 없는 헌신
4. 전문직이 일하는 조직의 특성
5. 대변자, 문제발견자로서의 전문직
6. 요양보호사가 전문직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
제6장 케어전문직의 윤리: 의료전문직의 경우
1. 의료윤리의 발전과 의사 퍼시벌
2. 의료전문직의 윤리적 책임 논의와 사회적 태도
3. 한국의 역사문화적 풍토와 의료윤리
4. 의료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기억과 전문직 단체
5. 허준은 태도다
제7장 케어사회의 인간상과 사회상
1. 상호적 인간을 배양하는 사회환경
2. 위기의 유대인을 구조한 사람들
3. 자살률이 낮은 지역 주민의 생활양식: 느슨한 돌봄
4. 미타라이 주민의 공생적 생활양식
5. 이아고를 몰아내면 케어사회가 실현될 것인가?
제8장 고령자 이해와 인지장애 및 임종케어
1. 노인을 보는 눈
2. 임종과 관련된 문제와 케어
3. 인생의 마지막 성숙을 지원하는 케어
4. 인지장애의 이해와 수녀연구
5. 새로운 관점에 선 치매 케어
결언: 돌봄 능력 그리고 돌봄 받는 능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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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朴光駿)
통영 출생.
현, (일본) 붓쿄대학(佛教大学, Bukkyo University) 사회복지학부 교수(전직, 1990~2002)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 교수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 (중국)시베이대학(西北大学) 객좌교수, 동국대학교(서울) 객원교수 역임
복지국가사상사, 동아시아 사상과 사회정책 비교연구, 동아시아 케어레짐 비교 등을 주된 연구주제로 삼고 있다.
노거수 찾아 사진찍기가 취미이며 은퇴 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있다.
대표적 저술은 다음과 같다.
국내에서 출간된 것으로는,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양서원, 2002), 『붓다의 삶과 사회복지』(한길사, 2010. 청호불교문화상학술상.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조선왕조의 빈곤정책: 중국 일본과 어떻게 달랐나?』(문사철, 2018. 세종도서), 『초기불교: 붓다의 근본가르침과 네 가지 쟁점』(민족사, 2020. 세종도서), 『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뿌리와이파리, 2022. 세종도서) 등이 있다.
일본에서 출간된 것으로는, 『社会福祉の思想と歴史: 魔女裁判から福祉国家の成立まで』(ミネルヴァ書房, 2004), 『老いる東アジアへの取り組み』(九州大学出版会, 2006, 공저), 『ブッダの福祉思想』(法蔵館, 2013, 붓쿄대학학술상), 『朝鮮王朝の貧困政策: 日中韓比較研究に視点から』(明石書店, 2020, 사회정책학회상) 등이 있다.
중국에서 출간된 것으로는, 『東亜: 人口少子高齢化与経済社会可持続発展』(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12, 공저), 『中日韓人口老齢化与老年人問題』(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14, 공저), 「公共年金制度建立的国家間学習: 以東亜為例」(『社会保障研究』, 2009.3, 中国人民大学) 등이 있다.